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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다. 2017. 천진 답사기연구소 2017. 10. 15. 23:12
이야기 1. 처음으로 밟아본 거대한 나라, 그러나 그렇게 크지 않은 사람들
하늘에서 내려본 중국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대륙? 거인? 광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제서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다를 간척해서 만든 육지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토지를 나누고, 개발하는 덩어리도 크다. 부지에 세워진 공장들이나, 무언가 식물을 키우고 있을 유리 온실, 아마도 노동자들의 숙소인 듯한 집들, 관공서들을 하늘에서 보는 건 마치 레고 블록으로 지은 자그만 마을이다. 그러나 몸으로 느껴지는 건 거대함, 그 자체다. 심지어 비어 있는 공지조차 입을 벌리게 한다. 인도에서 느낀 자연스러운 공지와는 다른 인공적인 공지였다. 그리고 공항에 내려와 학교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거리에 압도된다. 깔끔함과 허름함이 교차하는 그 속에서조차 새뜻한 느낌의 도로들 위에 오가는 세계 각국의 차들은 번들번들거린다. 생각해보면 중국이라는 나라의 풍경에서 이렇게 자동차로 가득한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언제부터였을까? 거리를 지나는 풍경은 허름한 빈민가들과 거대한 녹지지역들을 지나 멀리서부터 솟아나 있던 아파트들의 숲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숲이라는 곳, 그곳들도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단지와 단지 사이의 간격들은 여느 한국과는 전혀 다른 규모다. 애초부터 그 넓은 땅에 아파트가 무슨 의미였을까 싶을 정도의 고층아파트들이 여기저기 솟아 있다.
‘대륙’의 거대함에 주눅 들었던 마음은 운전자들을 보며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거대한 중국의 덩어리만큼이나 마음을 주눅 들게 했던 건 경제 대국이자, 군사 대국을 상징하던 그동안의 뉴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중국을 만나 시작된 그 현장에서는 어수선하다. 도로 위에 그어진 차선이 무색할 만큼, 자동차에 달린 방향지시등도 없이 모든 신호는 인도와 네팔처럼 클락숀 소리로 결정된다. 그러나 갑자기 차들이 멈춘다. 앞에 보니 신호등이다. 경찰이 없음에도 빛나는 신호 앞에 모든 차가 따른다. 정적인 신호들 앞에선 춤추던 이들이 동적인 신호들 앞에선 얌전해진다. ‘어쩌면 이들은 혼란을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도시화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자연의 규모에서 인간의 규모로 바뀌는 것, 질서의 순위가 자연이 아닌 인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사람들은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인력에서 기계력으로, 연필에서 스마트기기로 바뀌는 걸까? 지금 중국은 바로 그 전환의 자리, 모든 것이 한자리에 있는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 나를 압박했던 중국의 거대함은 어느새 애처로움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 우리가 열광했던 ‘응사’ 시리즈가 주었던 그리움, 상실감의 향수가 묻어난다. 아마도 아쉽고도 그리운 그 시대의 무언가를 지금의 중국이 잃어버리고 있다고 내가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의 현장이 그들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야기 2. 대학진학상담, 부모와 학생 모두 긴장하다.
이곳에서 지난 이틀간 아이들의 대학진학을 한 선생님께서 상담하고 계셨다. 교실 밖 풍경은 한국과 그리 낯설지 않다. 오랜만에 학교를 방문한 학부모들은 친구이자 학교 스탭인 분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다. 물론 긴장감을 여기저기에 꽁꽁 싸매면서. 그들의 긴장은 무엇일까? 재외국민특례입학을 통로삼아 한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분명 특혜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볼 때, 해외에서 일하는 상사직원들은 한국 국익을 위해 뛰고 있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들의 노력은 한국 경제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중동지역에서의 건설 노동자 일화들이 말하는 바나 대한민국 서울 강남에 있는 테헤란로나 이란 테헤란에 있는 서울로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일군들에게 주어진 자녀들의 국내 대학 진학. 그들은 한국내의 학생과 달리 이들은 정원외 입학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학교는 이들의 입학을 기꺼이 허락했다.
다만 3년전 한 대학의 입학사정관 책임자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학생들에 대해 큰 기대는 없어요. 하지만 국가를 위해 수고한 그들에게 학교가 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그 말대로라면 그가 경험한 대학 특례 입학자들은 어떻게 보였을까?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한국 얼굴을 한 외국인 즈음에서 머물렀을까?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외계인은 아니었을까?
이야기 3. 부모로 산다는 것, 국제인인가 한국인인가?
국제학교에서 만나는 부모들은 기대감과 두려움에 교차되는 감정을 갖는다. 그 하나는 외국에 살면서 얻게 될 축복이며, 동시에 한국에 있지 않기때문에 자녀의 교육량과 질, 그리고 그 평가에 대한 걱정이다. 그들은 국제학교의 교육 질에 크게 신경을 쓴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소통 속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현지 이들 부모의 상당수는 아이들의 상황을 자주 모니터링하는 편이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점에서 고민을 발견한다. 그 하나는 미국에 대한 애증이다. 이들은 자신의 자녀가 미국에 가면 잘될 것이라 믿는 편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자녀들에게 호의적이다고 믿지는 않는 것 같다. 두 번째는 한국의 왠만한 상위 대학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꽤 오래전에 외국 어디에선가 “우리 아이가 쟤보다 뭐가 못해서 S대학에 못가나요?”라고 되묻는 부모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동안 대학 특례가 국내 상위권 대학의 문턱을 크게 낮췄지만, 최근의 상황에 관한 불안의 반증이 아닐까? 세 번째는 학교에 대한 신뢰부족이다. 이 판단은 대학 진학을 이야기할 때 크게 나타난다. 이미 이들의 손에는 여러 대학의 정보들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쥐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고민들은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모두 대학이라는 관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RPG게임에서 단계를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걸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문에 다다를 수 없다는 불안함이다.
그래서 다시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이며, 그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은 국내외 어디에 살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해외에서 성장하는 우리의 상황을 다시 진단해 볼 수 있고, 또 우리의 목표점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국제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각 개인의 삶에서 스쳐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삶은 존재의 가치와 동반하며, 그 의미에서 해외의 성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이며 인생에서 직면하게 될 다양한 상황을 풀어낼 실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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