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아빠의 꿈과 육아
    ICTRC_letters 2022. 12. 8. 10:47

    익산은 오래전부터 복음이 들어와서 시골부터 도심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출산율 저하와 수도권 지역으로 젊은 인구들이 빠져나가는 이른바 소멸위험지역이며, 교회 역시 고령화와 교인 감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정착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교회를 찾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녀들의 교제 관계 형성과 아이들을 존중한 예배였습니다. 아무래도 익산으로 옮긴 이유 중 중요한 부분이 자녀들의 안정된 교육이어서 성인 예배와 활동이 부차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는 지역의 교회들은 대부분 성인 예배를 제외하곤 교회가 잠기는 형태이고, 교회 학교에서 또래 집단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노력과 별개로, 현실적으로 젊은 부부(40대를 포함해서)들이 고사한 이곳 지역사회의 현실은 곧 교회의 현실이라는 점을 몸으로 느낍니다.

    저희 가족은 서울교회에서 이뤄지던 온라인 예배가 6월에 종료되면서, 저희가 교회를 찾는 일도 바빠졌고, 주일학교가 잘 갖춰진 한 도심의 대형교회로 정착하였습니다. 아이들의 활동 반경 안에서 그들의 삶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기로 하면서, 그에 따른 부모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빠의 꿈”을 주제로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눔을 준비하면서, 아이의 양육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50살에 꾸는 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저널에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아마도 양육의 여정에서 아이보다 완전하고, 온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아빠들에게 “실수해도 괜찮아요. 우리도 아이와 같이 성장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인생에 부모의 선택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어떤 현상들이 부모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 아빠인 저에게 자녀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대신 자녀와 동행의 자리로 초대했던 그 이야기를 이제 나누려고 합니다. 

    꿈, 반백년의 시간에서 만나는 진로

    재외국민자녀의 진로교육을 준비할 때, 자녀들의 연령대를 셋으로 나누었고, 덴마크에서 진로 주제에 대한 질문에 기초하여 기획한 적이 있었다.  각 질문은 연령에 따른 ‘진로’에 대한 이해와 접근을 기초하여 만들었지만, 동시에 ‘진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아동기의 아이들에게는 ‘나는 누구인가?’, 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리고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들은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전환기의 성인들에게도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짚어야 하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진로는 개인의 기능과 발달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사회와 환경들 속에서 발생하는 유기적인 연결을 고려해야만 한다. 한 사람의 길은 사회 속에서 또는 사회와 함께 만들어지며, 아무리 개인이 탁월하더라도 사회성이 부족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탁월함이 무시될 수 있다. 

    그동안 부모교육을 진행하면서, 자녀의 잠재력과 역량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전통적인 방향에서 사회의 상호성을 이해하고 시선을 확장하는 것으로 전환해 왔다. 또 자녀의 여정을 조망하고, 필요를 제공할 수 있는 부모역량을 키우는 노력 대신에, 자녀와 소통하고 동행하는 방향으로 격려했다. 과거에는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양육’의 측면에서 대상화했다면, 지금은 가족의 구성원으로 함께 사는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자녀들이 성장하는 사회 환경을 부모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내가 가진 삶의 방식과 지식이 여전히 자녀들의 삶에 유효한지에 대한 의심이 크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자녀의 진로란 곧 나와 함께 사는 생활에서의 동행을 의미하고, 현실의 삶에 자신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렇듯 말이다.

    미래에서 오늘로

    인류는 예측가능한 미래를 낙관하고 걸어갔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근대화는 과학의 진전과 교육을 통해서 이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희망을 선언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나 역시 인지 역량을 강화하여 좀 더 나은 미래와 개인의 안락함, 풍요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졸업 후 닥친 IMF는 우리에게 안정된 평생직장 신화를 무너뜨렸다. 2001년, 선교지에서 만난 9/11테러는 세계가 더 이상 기독교 윤리 아래 있음을 깨닫게 했고, 2014년 세월호참사는 자녀와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각인시켜 주었다. 게다가 인간의 기대수명이 100세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노년의 삶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인공지능의 등장과 기계의 발달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과 장소를 점점 잃고 있다. 우리 세상은 오늘을 참으면 내일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었고, 청년들은 YOLO(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번뿐)를 인식하고 물리적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즉 자녀의 미래를 언급하기에 앞서 성인들, 부모들의 미래가 더 큰 위기로 다가오는 현실을 걷고 있다. 우리는 내일의 불확실함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하던 행위들 대신에, 오늘의 관계, 상황에 대한 유동적 대처, 그리고 현재의 만족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아이는 아바타가 아니다.

    통적으로 한국에서 양육의 기저에는 가족의 생존과 명예, 그리고 경제적인 역량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내포한다. 그래서 자녀의 교육 목표는 개인의 성취 못지않게, 가족 집단의 성취로도 나타난다. 이런 배경은 부모의 욕망을 자녀에게 투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가족이 분화되어 핵가족으로 축소되고 개인주의가 강화되었지만,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끊임없이 욕망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교육 목표와 방법들은 인간 수명이 늘어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부모의 직장과 그 노후가 보장되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연령 역시 높아지는 시대가 열리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자녀의 교육 목표를 바라보고 지원하기엔, 부모 자신의 내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안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 아이들의 미래를 자주 생각하곤 한다. 그 미래에서 내 역할은 내가 성장할 때 부모님이 감당하셨던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정도 우리가 다니던 시절보다 그 내용이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들이 추가되었다. 무엇보다 현재의 대학이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못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아이들은 저학년조차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으며, 그에 비해 어울리는 친구의 수도 적다. 그래서 아이들의 관계성은 주로 학교라는 통제된 환경을 중심으로 학습된다. 아이들이 배우는 학습량과 질은 경쟁적인 입장에서 평가되고 있으며, 그마저도 미래를 보장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의 미래가 자녀의 성공과 깊게 연관된 과거와 달리, 아이의 미래나 성인의 미래 모두 유연함과 순발력을 통해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내가 살았던 시대의 아쉬움을 내 자녀에게 투사하는 것만큼 자녀의 미래를 망쳐버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행복감이 내일을 준비하며 감내하는 인내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누리는 오늘을 좀 더 소중하게 바라보고 싶다.

    신앙은 삶이다.

    동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엇일까? 선교현장에서 길거리 아이들을 만났을 때,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 가난한 교회와 부유한 교회 들이 공존하는 현장 사이의 공백과 수프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이 만드는 따스함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믿고 달려왔던 ‘땅끝’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내 증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복음을 설명하고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언어와 종교의 유희보다, 땅 위에 서서 내 주변의 환경에 날마다 답하며 선택하는 현장의 삶이 더 크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교적 제의 현장보다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존중히 여기는 그 현장일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만나는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가족, 친구, 공동체에서의 유대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즉 신앙이란 현재의 삶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일상이다. 

    리고 또 한 가지는 신앙은 공동체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신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유대감은 각 개인의 삶에서 다른 행동을 요구할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를 직면하는 인간은 과거 세대와 다른 가치체계를 갖거나 행동의 차이를 보여주곤 한다. 내 자녀가 살고 있는 환경은 내가 살아왔던 환경과 다르고, 가치의 일부도 다르다. 예를 들면, 내가 어렸을 때는 튀지 않고 표준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였지만, 지금은 표준의 범주 밖으로 튀어 나가는 독특하면서도 자발적인 것을 가치로 여기고 있다. 이런 가치 차이로 인해 세대 담론도 다르고, 동일한 현상에 대한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 그 간극을 좀처럼 좁히지 못한 채 충돌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도 이런 사회적 가치와 환경의 변화 안에서 다른 결과로 나타나 충돌하고 있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자녀의 신앙이란 내 가치와 행동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행동에 내재한 근원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자녀들이 신앙 공동체들이 행동하는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참여하고, 경험하고, 숙고하여, 비판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긴 여정에 부모가 동행하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신앙을 살아내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자녀이기에, 선택의 몫도 그들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내려놓는 것을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내일이라는 미지의 바닷길을 항해한다.

    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라고 부여받은 지위로 결정되지만, 그것으로 부모가 “된” 것은 아니다. 부모는 아이의 매 순간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자녀를 이해하고 배우며, 갱신해 간다. 아이 역시 관계 확장과 호르몬의 변화로 성인이 되는 여정, 사춘기라 불리는 청소년기를 거치는 여행을 통해 부모와의 관계성을 재설정하게 된다. 격동하는 성장기와 갱년기의 충돌이 벌어지는 가정은 어떤 의미에서 불협화음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동반자라는 배가 새로운 항구를 찾는 여정의 공동 항해로 볼 수 있다. 항해는 선장과 선원, 그리고 배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속들의 결합을 통해 그 질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와 바다 상태와 같은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라는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기술들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가족을 부양할 역량 요구가 커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에 짓눌리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나는 불편한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 이렇듯 부모는 이전의 항해지도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장을 경험하면서 결정하고, 또 머리를 맞대고 길을 찾는 기술을 배우고, 찾아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부모가 가족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내려와 겸손히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동시에 가족의 지지를 통해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우리 가족 모두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이라 믿으며…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33-3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