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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에 대한 이야기 1. 관계성연구소 2017. 1. 31. 00:02
선교사자녀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가 관심을 가져야 했던 항목이 있다면 대학진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강의도 준비하게 되었지요. 물론 외국인전형과 수시 정보를 정리해서 부모인 선교사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다루게 된 주요 부분은 선교사자녀들의 국내 재입국에 따른 적응에 관한 이슈였지요. 그리고 2009년즈음 대학 진학과 국내 재진입 이슈를 통합해서 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기면서 제 관심은 점차 “대학 진학"에서 인생의 “진로”라는 좀 더 큰 그림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계기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소위 SKY대학 학생들조차 취업에 대한 긴장감이 외부로 표출되면서 드러난 한국 사회 전반의 청년 실업 문제와 대학 기능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진학에서 진로라는 강의 중심이 움직이면서 그에 대한 여러 꼭지들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한 꼭지를 다루고자 합니다. 새해 첫 글이 되기도 하네요.
인류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관계”는 중요한 삶의 기술이자 현상이었습니다. 혈연적, 지역적, 그리고 신분적인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 관계는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는 개인의 생존과 번영, 때로는 추락과 멸망과 같은 미래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게 됩니다.
오늘날 신분 상승과 같은 가능성을 갖게 된 시점은 적어도 봉건제 붕괴 이후 새로운 시민 사회가 출현하는 지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교육이후로 신분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19세기 후반즈음에 좀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그리 얼마되지 않은 일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사회적 진출을 보장받았던 시기는 근대화라는 산업, 정치적 변화 속에서라고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공교육의 실행이었고, 그 저변에는 이성의 낙관적 미래관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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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사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갖게 된 신화였고, 물론 실제로 한국 사회가 빠른 산업화 속에서 부의 획득과 신분 상승을 개인의 노력과 인지적 학습 능력의 차이로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혈연, 지연이 자리하고 있었고, 국제적인 국가 간의 관계성과 종교적 호혜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현실 사회는 국제 사회의 재구성과 저성장, 그리고 빠른 기술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작동하던 힘들이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대신
넘치는 지식을 정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하는 일, 즉 직면한 문제를 푸는 능력이 점차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를 꼽자면 지식입니다. 적어도 20세기 후반까지는 지식을 알고 있는 그 자체가 힘과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공유가 보편화되고,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이뤄지면서 지식의 소유는 그 매력을 잃었습니다. 그대신, 넘치는 지식을 정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하는 일, 즉 직면한 문제를 푸는 능력이 점차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를 푸는 능력은 하나의 '정답'이 아닌 상황에 따른 여러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 문제를 풀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은 "혁명"이라 불리게 되는데, 인류의 역사 그 자체에서 "지식"에 대한 가치 인식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죠. 돌이켜보면 정보를 소유하는 방식은 구전, 그림, 글 등의 방식이었고, 그마저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전달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르네상스를 여는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소수의 선택된 계층에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정보가 전달될 수 있게 된 것이죠. 다만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한정됩니다. 이런 흐름은 19세기에 들어와 공교육이 시행되면서 문맹율은 급감하게 됩니다. 문자를 읽을 수 있음에도 정보를 검색하고, 발굴하는 일은 소수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은 아주 쉽게 검색을 통해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요. 오히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쓸만한 정보를 찾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도서관을 구지 찾지 않더라도 필요한 정보를 즉시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 속에서도 여전히 굳건한 것들이 존재합니다. 진로를 생각할 때 지식의 소유와 더불어 중요하게 다뤄진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를 맺는 방식은 다양해졌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톨이조차 가상적 존재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거나 가명으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역사 속에서 계층과 계급은 관계를 설명하기 쉬운 예가 됩니다. 관계의 질은 일종의 신분적 의미와 더불어 자신을 포함한 가문의 미래를 보장하는 요소였기에 매우 신경써왔다는 사실은 어느 문화에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의 가치가 달라진 오늘에 관계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확장된 것은 아닌지 싶어집니다.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부분들은 따로 한 꼭지로 다뤄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로에 있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관계”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갖게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배워야 할"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짚어보자면, 마을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관계는 전통적으로 흘러온 삶의 양식을 바탕으로 하며, 학습하게 됩니다. '학습'이라는 측면은 일상의 삶에 달라붙은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속한 이상 어떤 모습으로든 일어나기 때문에 종종 간과됩니다. 그리고 경제,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학습 기술은 다르게 형성됩니다. 거기에는 태생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부모와 주변 환경, 그리고 삶의 가치와 목적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되곤 하죠. 하지만 그런 기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습태도와 본질에 대한 변하지 않는 핵심 역량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저는 여기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과목을 주목합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과목은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이들이 학습의 태도 즉, 관계성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자면 윤리와 도덕을 단지 철학 수업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과목이 갖는 의미는 (적어도 제가 볼 때에는) 학습과정 속에 함께 하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구성하도록 동기를 제공하고, 사회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습득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학습의 핵심 역량은 수업의 내용보다 배움이 일어나는 자리에서의 태도, 관계성이라고 보는 것은 나름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에서는 여전히 “개인”이 습득한 지식의 양을 계량하는 방식이기에, 관계를 배울 기회는 점점더 사라지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지식의 양보다는 통합과 문제해결능력으로 움직이는 교육 현실은 “양”중심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국 교육에 치명적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실제로 핀란드는 교육 통합에 따른 교육 방식의 전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이런 전환의 중심에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보를 타인들과 함께 문제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습니다.
참고. 핀란드 학교들: 교과목을 폐지하고 '주제들'로 대체한다. 리차드 가드너. 인디펜던트지. 2015. 3. 21. (Finland schools: Subjects scrapped and replaced with 'topics' as country reforms its education system 2015. 3. 21.)
배움에 있어 관계성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고 있는 필연적인 요소입니다.
그 관계를 맺는 “질”과 “태도”는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그 힘은 어떤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로, 반대로 부정적인 결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소란스런 현 정부의 사태도 관계성의 질과 태도에 따른 부정적인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고구마 넝쿨처럼 하나의 결과에 딸린 여러 관계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건 인간의 사회성과 맞물린 현상이니까요.
이를 교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계성은 문제 해결 능력의 중요한 자산이자 공공성으로 확대되는 길이 됩니다. 이점에서 부모의 삶에는 공적인 네트워크와 사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이 둘이 적절히 섞인 네트워크들이 공존하며, 새로운 타인을 이어가는 연속성을 띄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녀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네트워크 일부를 유산으로 남겨줍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그 네트워크에 개입할 여부와 개입의 정도를 설정하게 되고, 사회 윤리는 이 지점에서 사익과 공익 사이에서 균형을 갖게 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이론적인 것이고, 현실에서는 공익의 사유화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관계의 유산 과정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를 유익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아마도 다른 꼭지로 다뤄야겠지요.
최근 사회적 기업과 청년 기업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관계성"입니다. 여기에는 관계성에 내재된 성실과 정직, 공익성, 그리고 수익이라는 측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성의 질을 결정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윤리"와 개인의 "태도"를 살펴본다면 자녀 양육에 필요한 것들을 좀 더 알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링크를 걸어봅니다.
부모의 귀농과 실패, 그리고 자녀의 도전이야기: 부모님이 헐값에 팔아넘기던 고구마, 딸의 마케팅 전략으로 경매에서 전국 최고가/잡아라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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