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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연합, 다문화, 그리고 선교사자녀 교육 방향성
    연구소 2017. 7. 15. 22:22


    “선교사자녀의 진로”라는 측면을 고민하면서 해법의 실마리를 엿본 것이 “다문화주의”였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회의 다양성에 관한 정치 해법이었습니다.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유럽 내 모슬렘 이민자들을 향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정책을 다룬 정마태 선교사님의 논문이었고, 이어 프랑스의 “상호문화교육”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저에게 다문화 현상을 풀어가는 해법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고, 동시에 사회 통합이라는 숙제가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유럽연합의 통합과정과 관세 철폐, 경제 동맹,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로화로 귀결된 경제 통합이라는 일종의 연대 장치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통합을 위한 일련의 정책들은 다양성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저에게 장밋빛 희망을 던져주었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엔 말이죠. 거기에 시리아 난민의 무조건적 수용을 선언한 메르켈 총리의 인도주의 조치는 환상적인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안가서 독일의 결정이 유럽연합에 미치는 파급력을 알게 되면서 유럽연합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유럽연합이라는 존재가 국가간의 상호 책임이 없다는 정치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였죠. 프로테스탄트의 세계관을 가진 저에게 독일의 정책은 합리적이고 윤리적 타당성을 보여줬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다른 시각들을 보면서 정치적 맥락에서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하나는 독일 내 복지정책의 후퇴와 경제 격차의 심화, 그리고 남부 유럽의 유럽연합 채무국에 대한 가혹한 긴축정책과 이중성이었습니다. 채무국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가 있겠지만, 문화 차이로 인한 국가간의 조율 없이 채무국의 기준을 바탕으로 요구하는 위계적인 맥락도 큰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그 자체의 존재 가치보다 경제 가치라는 점에서 유럽이 자랑하던 평등한 관계성이 뒤틀려진 느낌이랄까요? 유럽연합의 최근 횡보는 유로화의 방어입니다. 유로화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유럽연합은 유로화를 방어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 안에서 각 국가의 독특한 가치들이 만든 조화가 붕괴하고, 유로화의 가치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습니다. 여기에는 무능한 자국내 정치인들이 한몫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제가 그동안 일방적인 정보에 의존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유로화의 장밋빛은 세계 경제의 순항 속에서 만들어진 무책임한 낙관론의 결과입니다. 미국의 모기지론 사태 이후 전 세계 경제는 크게 휘청거렸고, 그에 따른 파급은 유럽연합 소속의 상당 국가들의 건전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아마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자가 된 셈이죠.(PIGS: 포르투칼,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을 비하한 표현)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이해하면서, 유럽연합으로부터 다양성을 유지한 통합의 지혜를 찾고자 했던 것에 문제의식을 안게 되었습니다. 세계화의 흐름, 신자유주의에 문을 활짝 연 현재의 유럽연합은 다양성을 경제 등급으로 처리하는 양상이고, 시리아 난민의 급속한 유입의 부작용으로 유럽연합내에서 남유럽 국가들과 중북부 유럽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독일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민족주의 중심의 극우 정당이 큰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다양성의 생존을 위해 일어난 경제 구조체는 이제 다양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돌아선 것입니다. 물론 유럽연합의 정치적 부재라는 측면은 유럽 각국의 다양성을 담보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입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의 다양성, 다문화의 공존을 위한 노력은 실패했다고 봐야 할까요? 적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의 냉전 속에서 나타난 연합체들은 소련의 붕괴 이후 재편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특히 경제 부분에 있어서, 실용적인 측면과 아울러 윤리적 측면도 작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방 진영의 동유럽 지원은 소련 붕괴 이후 서방 체제로의 유입을 의도한 목적도 내포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는 세계대전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유럽의 현재 모습은 비록 유로화의 실패로 인한 분열의 양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그림자는 전쟁의 공포로 볼 수 있겠죠.

    이런 흐름 속에서 유럽이라는 지리적 통합 구조는 어떻게 재구성될지는(또는 전쟁?) 아무도 모릅니다. 유로화가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 속에서도 이전의 화폐로 돌아갈 수 없는 절박함이 존재합니다. 채무국은 채무국대로, 채권국은 채권국대로 말이죠. 게다가 유럽의 내부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의 영향력이 미칠 파장은 이미 앞서 살펴본 대로 유럽연합의 구조에 치명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의 상황에 있어 재난이라 말하는 이도 있고, 위험 신호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임은 확실합니다.

    게다가 유럽연합은 소속국가들의 피나는 노력과 성과에 상관없이 다양한 외부의 영향력을 변수로 안고 있다는 것도 난제일겁니다. 가장 큰 영향력은 경제적 충격일 겁니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정책을 기조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상호의존도는 이전보다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가진 윤리적 입장보다 경제적 입장이 자국민 뿐만 아니라, 각국의 관계속에서 더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죠.

    이렇게 쓰고 보니 비관적이긴 한데, 혹 유럽연합이 무너진다면 유럽이라는 연대 체제도 무너질까요?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고 예견합니다. 그 하나는 시민적 관심과 정치적 관심의 차이입니다. 또 하나는 국경이 거의 무의미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의 초국적 연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난민에 관한 국가 정책의 변화는 이 두 가지를 보여 줍니다. 시리아 난민 유입은 비록 메르켈 총리의 무조건적 수용과 헝가리 난민의 독일행 탈출은 결과적으로 독일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일단락됩니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이 다양성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사회적 다양성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인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공존합니다. 최근 성 소수자에 대한 판단 측면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양성에 관하여 부정적 측면이 압도적인 듯싶지만, 인권의 근거나 윤리성 모두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들이 이뤄진 사회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서구 사회였기 때문이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세계 기독교는 탈제국주의적 형태로 이어집니다. 제삼세계 기독교는 보편적 인권과 함께 계층화와 착취를 국가 내부의 구조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구조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이는 다른 면에서 기독교 내부의 서구중심의 신학과 윤리성을 고발합니다. 이런 흐름은 다양한 영역에서 보편적 인권을 증진하는 현상으로 확대됩니다. 

    어쨌든 유럽연합의 현재 모습 속에서 다양성을 살펴보려는 저의 현재까지 노력은 그동안 유럽 사회가 문화변용(Acculturation)을 통한 연합의 그림에서 경제 가치로 단일화되어가는 유럽의 독일화라는 일종의 동화(Assimillation)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유럽의 시민사회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저항하고 있다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양성, 다문화 현상을 풀어가는 노력은 첫째, “민주 시민”을 교육 목표로 삼는 것이며, 관계성과 정치 통합을 실천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편적 인권”을 실천하며 체득하는 과정이며, 가치를 소통하는 방법론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함께 살아가는 현장에서의 공존을 실현하는 경제 공유 구조의 필요성입니다. 유럽연합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 통합 속에 상실한 정치력은 획일한 가치판단을 강요했지만, 이를 저항하고 있는 힘은 상당수 “시민”들의 정치 합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 세계전쟁을 통해 생존 본능을 국가간 상호의존 구조의 경제 공동체로 실현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럽연합이 여기까지 온 근거에는 만장일치라는 정치 방식입니다. 다양한 위기를 통과하면서 소통을 통해 가치를 실현해 왔다는 점에서 상호구조를 자연스레 습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울리히 벡은 유럽 연합의 근본 바탕을 네 가지로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유럽연합이 공존을 위한 상호의존성과 책임성을 공정성에 바탕으로 했으며, 두 번째는 이를 위해 타협과 보상을 원칙으로 삼았고, 세 번째는 문화 다양성을 인정한 조정의 방식을 취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약한 자를 위한 착취 방지의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유럽연합의 상황을 통해 선교사자녀교육을 어떻게 고려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한국의 공교육 기본 원칙에 울리히 벡이 언급한 유럽연합의 근본 바탕을 교육 목표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미 한국 교육 방향성에 언급된 홍익인간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접근에 교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자녀 교육 방향성에 민주 시민, 보편적 인권, 공존의 사회, 만장일치에 준하는 합의적 소통을 반영함으로 다양성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의 최종적인 모습은 이중의 주권/시민권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동성에 기반을 둔 세계시민이고, 다른 하나는 패스포트 또는 가정 중심의 주권 정체성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주권의 근원에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내포해야겠지요. 방법론으로는 보편적 인권 의식과 교실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현재 교육제도는 일반적으로 결과 중심의 인지 학습에 의존합니다. 학습자 중심의 교육방식과 더불어 문제 해결 중심의 교육 방식을 반영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커리큘럼을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 꼭지로 다뤄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문제의식은 바로 유럽 연합이 직면한 현실과 다문화 현상이 직면한 현실의 유사성입니다. 그리고 곧 선교사자녀들의 현실과도 이어져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민족주의 정체성을 근거한 우월성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다양성의 공존을 추구하는 모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럽연합의 붕괴는 유럽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민족과 국가에 기대었던 근대화의 붕괴와 이어져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말은 결론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시민의 염원은 유럽의 안전과 생존의 공동체에 있습니다. 이런 바램은 국가주의를 넘어 새로운 체제로의 도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도전은 불확실하며 불안을 야기하지만, 다른 그 어떤 방식도 오늘의 우리에게 확실함과 안전을 주지않는 현실이란 점에서 한편으로 위안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치가 현실에서 실현될 것인지 내일의 문을 열어 들어가는 방법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제 생각에는 직면한 문제를 풀어 내는 것, 그리고 어떤 가치를 품어 설득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글이 산만하게 전개되었지만, 인간에 대한 낙관성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포함하여 유럽연합의 현실 속에 투영된 다양성의 위기, 그리고 선교사자녀 교육방향성을 거칠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봤습니다. 


    참고한 서적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
    국내도서
    저자 :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 이종인역
    출판 : 책과함께 2014.10.10
    상세보기
    유럽연합의 종말
    국내도서
    저자 : 얀 지엘론카(Jan Zielonka) / 신해경역
    출판 : 아마존의나비 20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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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위기의 정치학
    국내도서
    저자 : 울리히 벡(Ulrich Beck) / 김희상역
    출판 : 돌베개 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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